향가작품은 삼국유사에 14수와 균여전에 전하는 11수를 합쳐 25수뿐이고 여기에 고려 초기 예종의 도이장가나 정서의 정과정을 향가에 포함시켜 다룬다 해도 그 양은 많지 않다. 그러나 향가가 현전하는 국문학 유산 중에서 양식화된 서정시 형식의 최초의 완성된 형태임은 분명하다. 이러한 문학사적
노래를 지었다 하여 희명(希明), 도적들도 익히 그 명성을 알고 있을 정도로 향가를 잘 지었다 하여 영재(永才), 임금과 자신 간의 신의 및 임금에 대한 연모의 정을 노래했다 하여 신충(信忠) 등과 같이 이름에 설화의 내용이 수용되어 있다. 따라서 향가 작가의 상당수는 실존인물이 아니라 설화상의 가
기록된 향가문학은 첫째, 우리말을 우리 방식으로 처음 표현(기록)한 문자라는점, 둘째, 한역되지 않고 원문 그대로 가사가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시가(詩歌)란 점, 셋째, 향가 작품마다 배경설화가 동반되어 문학과 역사가 어우러진 예술이란 점 등이 우리 문학사에 있어 큰 의미라 할 수있다.
많다. 888년에 위홍과 대구가 향가집 `삼대목`을 편판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제망매가`, `찬기파랑가` 등이 뛰어난 문학성을 보이는 작품들이다.
(3) 한시
이 시기에는 한자가 전래되어 한문학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 시와 최치원의 한시 등이 있다.
향가가 더이상 창작되지 않았으며 예종이 1120년에 지은 〈도이장가 悼二將歌〉를 향가의 잔존 형태로 보고 있다.
순수한 우리글이 없었던 때에 우리말로 된 노래를 기록해야 했기 때문에, 향가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쓰는 향찰로 표기되어 전한다. 〈서동요〉의 첫 구절 '善花公主主隱'은 '선화
향가가 된다는 등식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현전 향가를 수록하고 있는 삼국유사가 고려때인 13세기에 완성된 점, 그리고 향가 작품들 가운데는 문자로 지어졌다기보다는 노래로 부른 민요적 성격이 강한 것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향가라는 양식은 노래로 창작되어 가창되고 전승되었으며,
시가의 명칭으로 쓰임에 혼동을 가져왔다.
1) 鄕歌
먼저 향가의 개념을 규정한 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향가는 시대로 보면 신라, 표기상으로는 향찰, 그리고 이들 노래의 형식은 대개 4구·8
구·10구로 구성되어있다.
다음으로 향가의 語義를 정의해 보면, '鄕'은 중국에 대한 우리나라를 지칭한
)에 의해 엮어진 균여전(균여전)에서이고, 이후 김부식(김부식)의 삼국사기(삼국사기)와 일연(일연)의 삼국유사(삼국유사)등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문헌상에 사용된 범위는 한국 고유의 노래라는 뜻으로 넓게는 삼국 이전의 시가로부터 좁게는 [서동요] 이후 신라의 정형가요에까지 이른다.
서동요 역시 배경설화를 참조해보면 진평왕 당시까지 전해오던 민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설화의 전개상 서동요는 빼어버릴 수 없을 만큼 서사구조에 긴밀하게 연관되어있다. 그렇다고 서동설화가 생기면서 이 노래가 같이 이루어 졌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서동요 자체가 배경설화 속의
② 창조적 측면
이 소설은 제목부터가 처용가를 계승해서 쓰여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정신병원의 여러 환자들의 모습을 통해 작가가 단순히 의처증만을 다루고자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신병원 원장 한 마태오의 입으로 서술되는 여러 환자들과 그가 바라